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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열말씀 - 2.언약의 말씀

쉐마2614 2026. 5. 22. 04:3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율법의 무거운 멍에에서 벗겨내사 참된 안식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심령 위에 가득하기를 먼저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흔히 십계명이라 불리고 있는 '언약의 열 말씀'의 진짜 본질이 무엇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자로서 오직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만을 선포하고자 하니, 마음의 귀를 열고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 34:27-28]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오늘날 대부분의 건물 교회는 율법을 성도들이 여전히 지켜야 할 계명으로 취급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책임져야 할 율법의 의무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찬송가 뒷면에 십계명을 붙여놓고, '비록 완벽하게 다 지킬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지켜내야 마땅하며,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전적인 은혜를 인간의 행위와 종교적 열심으로 희석해 버리는 또 다른 율법주의에 불과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구절구절 율법을 흉내 내는 것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과거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켰던 613가지의 토라 계명과, 그것을 지키기 위해 파생된 6천여 가지가 넘는 부수적인 규칙들, 곧 '장로의 전통(장로의 유전)' 중에서 도대체 우리는 어디까지를 예수님이 완성하신 것으로 보고, 또 어디서부터를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성도의 몫으로 분류해야 합니까?

율법의 완성을 인간의 행위로 채우려 하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종교적 계산과 정죄의 굴레에 다시 갇히게 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어떤 계명은 지금도 지켜야 하고, 어떤 계명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율법을 '어느 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 모순을 알기에, 결국 그들이 꺼내 드는 신학적 궁여지책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제사나 의식에 관한 법(의식법)과 이스라엘 신정 국가에 국한된 법(시민법)은 폐기되었지만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므로 지켜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제사나 할례, 음식 규례와 절기 같은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이미 성취되었기에 오늘날 문자적인 구속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재산 분배나 형벌 등 이스라엘의 사회생활을 규제하던 '시민법' 역시 구약의 신정 체제가 종식되면서 그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의식법과 시민법은 폐기되었으니, 이제 성도에게 남은 것은 '도덕법'뿐이며 이것만큼은 악착같이 지켜내야 한다는 교묘한 논리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교회가 된 성도가 아닌, 대부분의 건물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율법의 실상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주체가 되어 행위로 지켜내야 할 '규칙'으로 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나 목적이 완전히 사라진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주권적 계시가 아니라, 인간이 채워야 할 행동 지침서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라고 선언하셨을 때, 도대체 어디를 보아서 어떤 법은 성취되었고, 어떤 법은 신정 체제가 끝났으니 구속력이 없으며, 또 어떤 법은 영원한 도덕법이니 우리가 계속 지켜야 한다고 나누어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십계명 역시 오늘날까지 문자 그대로의 행동으로 지켜내야 할 '열 개의 계명'이 맞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상황을 배경으로 삼아,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를 선포합니다.

즉, 율법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행동 지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재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광야로 인도하시고 십계명 돌판을 주신 것은, 그들이 문자 그대로 계명을 행하여 '율법에 성공한 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베드로 사도는 그것이 인간의 행위적 성공이 아니라, 장차 오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기 위한 계시의 말씀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율법의 돌판은 인간의 불가능함을 폭로하고, 오직 영원한 산 돌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은혜의 이정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본문 안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십계명'이라는 단어는 출애굽기 34장 28절, 신명기 4장 13절과 10장 4절 이렇게 오직 세 번만 등장할 뿐입니다.

[출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신 4:13]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오늘날 많은 교인이 십계명을 신앙생활의 절대적인 도덕적 행동 지침이자 성경의 중심 기둥처럼 떠받들고 있는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뜻밖의 사실입니다.

[신 10: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성경이 이 단어를 단 세 번만 기록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지켜서 의를 쌓으라고 주신 독립된 규범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제한적인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의 “이 말들을 기록하라”에서 “”이라는 것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에서 “”, 그리고 28절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에서 “말씀”과 “계명”이 다른 단어가 아닙니다.

히브리에서 다 같은 ‘말’ 혹은 ‘말씀들’이라는 단어로 ‘데바림’(단수,다바르)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진리를 담은 하나님의 말씀들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출 15:13, 새 번역] 주님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수 구원하신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으로 그들을 주님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이라는 언약의 땅에 인도하시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처소로 삼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출 15:17, 새 번역] 주님께서 그들을 데려다가 주님의 소유인 주님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주님, 이곳이 바로 주님께서 계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세우신 성소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셔서 그 언약의 말씀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미 언약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 주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28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상태, 즉 언약의 말씀으로 인해 "진리 안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떡과 물이 필요 없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말씀이신 그분이 생명의 떡이 되시고 생명의 물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세상의 떡과 물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십계명’이란 없는 말이며, 계명이라고 번역된 말은 언약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십’(열)이라는 말은 ‘아세레트’라는 말인데 ‘십계명’이라고 번역된 말을 원어로 표현하자면 ‘아세레트 하데바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십(열) 곧 말씀’, ‘십(열)이라는 말씀들’ 혹은 ‘열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십이 곧 말씀이고 말씀이 곧 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십(10)’ 혹은 ‘’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조항의 개수를 세는 단위가 아닙니다. 이는 히브리적 관념에서 ‘가득 찬 수’, 즉 부족함이 없이 꼭 필요한 만큼 가득 채워진 ‘완전한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열 가지 조각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은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떡과 물 없이도 하나님과 함께하며 누렸던 그 결핍 없는 충만함이 바로 ‘십(10)’이라는 숫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열(10)’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온전히 성취된 상태를 자주 계시하곤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내려진 ‘열 재앙’은, 단순히 재앙의 횟수를 채운 것이 아니라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더 보탤 것 없이 가득 찬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출 9:14-16, 새 번역]
14 이번에는 내가 나의 온갖 재앙을 너와 너의 신하들과 백성에게 내려서,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이 없다는 것을 너에게 알리겠다.
15 내가 팔을 뻗어서 무서운 질병으로 너와 너의 백성을 쳤다면, 너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16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여 주어,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또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의 지혜가 그 나라의 모든 박수나 술객보다 ‘열 배’나 나았다고 한 것,

[단 1:20, 새 번역] 왕은 그들에게 온갖 지혜나 지식에 관한 문제를 물어 보고서, 그들이 전국에 있는 어떤 마술사나 주술가보다도, 열 배는 더 낫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세상의 학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결핍 없이 완전한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세레트 하데바림’은 단순히 지켜야 할 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부족함 없이 온전히 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그것을 언약의 말씀으로 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지키고 행하여서 생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의 말씀대로 이루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8절에서 선포한 “내 말들의 뜻대로” 이해한 진짜 복음의 실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뜻’이란, 하나님께서 그 법을 주신 궁극적인 취지와 목적, 의미와 이유, 그리고 최종적인 목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을 그저 인간이 손과 발로 지켜내야 할 ‘문자적 조항’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법을 흉내 내며 계명대로 행하고 순종하는 척하는 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언약의 말씀이  폭로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참된 취지와 목적, 곧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그 본질을 우리 마음에 담고 새겨지지 못한다면, 언약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십계명을 기록하고 있는 출애굽기 본문을 눈 씻고 찾아봐도, 거기에는 ‘제1계명’, ‘제2계명’, ‘제3계명’… 이런 식으로 1 계명부터 10 계명까지 번호가 전혀 붙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어 성경의 문장 구조와 단락 구분을 따라가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장을 정직하게 나눈다면, 이는 우리가 아는 '10개의 계명'이 아니라 오히려 14개의 독립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순수한 문장의 개수로만 본다면 '14 계명'으로 분류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는 뜻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십계명'이라는 표현은 결코 조항의 개수가 열 개라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숫자의 껍데기에 갇혀 말씀을 조각내어 지키려 했던 인간의 종교적 본성이, 성경 원문이 가진 통짜의 흐름을 얼마나 왜곡해 왔는지를 폭로하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열 말씀'이라고 표현했다 하여 이를 무조건 열 개의 조각난 계명으로 짜 맞춘 것은, 명백히 인간의 종교적 본성이 개입된 인위적인 조작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조목조목 세어가며 지켜야 할 체크리스트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번호조차 없는 언약의 말씀을 억지로 열 개로 가르고 쪼갠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내가 행위로 지켜서 증명할 수 있는 '종교적 숙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위적인 분류는 율법의 진짜 취지인 하나님의 완전한 언약적 상태를 가려버리는 왜곡일 뿐입니다."

결국 성경이 명시한 ‘아세레트 하데바림(열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리가 쪼개어 지켜야 할 열 개의 계명을 조치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이라는 충만하고 완전한 언약의 말씀 안에 당신의 온전한 진리를 통째로 담아내셨으며, 오직 그 말씀의 통치 안에만 참된 안식과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벽하게 해방한 ‘상태’ 임을 가리켜, 이제는 그 어떤 율법을 가지고도 우리를 결코 정죄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문자에 묶여 번호를 매기고 조각난 계명을 지키려 달음박질하던 자들에게 율법은 끊임없는 죄의 고발장(사망의 법) 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완벽한 언약 성취와 연합하여 ‘이미 가득 찬 진리의 상태(생명의 법)’가 된 성도에게 율법은 더 이상 심판의 칼날을 휘두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열 말씀, 이것을 단순한 ‘계명’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지켜야 할 무거운 법조문으로 보고 끝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문자 안에서는 그 누구도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십계명이 아니라 ‘열 말씀’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이 가득 찬 말씀의 상태 안에서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를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심으로 ‘택하신 족속’이 되게 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 그리고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의 상태로 삼으신 것은 결코 법조문에 갇힌 십계명 돌판이 이뤄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살아 계신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온전히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 역시 문자로 기록된 율법의 조문을 행위로 지키는 것은 인간에게 결코 생명을 누리게 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5-6)

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2-15)


언약의 말씀이란 결코 우리가 주체가 되어 지켜내야 하는 계명이나 율법의 조문이 아닙니다. 언약의 말씀이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걸고 친히 이루어가실 구원의 실재를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 약속이 누구일까요?


바로 언약의 말씀 안에 담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약의 말씀이 곧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면, 인간이 율법의 무거운 정죄와 멍에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 7장에서도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주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율법으로 보고 어떻게 이 계명들을 지킬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하나님께서 열 말씀을 주셨다면 그 속에는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렇게 이루실 것이라는 언약인 것입니다.

결국 소위 말하는 십계명, 열 말씀이란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며 그것이 곧 언약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열 말씀은 인간의 달음박질로 쟁취해야 할  숙제가 아니라, 반드시 '되어야 할 말씀'이며,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폭로하는 영적인 실상을 똑똑히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 채 법조문이라는 껍데기를 붙들고 내가 행위로 순종해 보겠다고 달음박질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복음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씨앗을 보지 못하고 오직 땅에 돋아난 푸른 풀만 뜯어먹는 ‘짐승 된 자’들입니다!

풀을 먹는 짐승은 평생 만족함 없이 땅만 보며 달음박질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열 말씀이라는 언약 안에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자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허락하신 ‘씨 있는 채소와 씨 맺는 열매’먹게 된 진짜 ‘사람이 된 자’들입니다!

생명의 씨앗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기에 더 이상 갈증이 없고 정죄가 없습니다. 짐승처럼 땅의 행위를 갈구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이제 하늘의 양식을 먹는 참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안의 완전한 해방을 누리십시오!

문자의 무거운 멍에를 벗어던지고,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과 생명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