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심령 위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십계명이라 부르는 계명, 즉 언약의 말씀을 지켜야 할 무거운 법규로 오해하지만, 그 배경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철저히 은혜의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율법을 단순한 규칙으로 본다면 무거운 짐이 되지만, "언약"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은 곧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만일 인간인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율법을 행위로 완전하게 지키는 것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것이죠
"야고보서 2:10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라도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이는 인간이 율법을 완벽하게 수행하여 스스로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단언하는 것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지난 수 천년에 이르는 인류의 역사에서 드러났듯, 인간은 여전히 은혜 없는 "종교 행위"에 기대어 스스로를 만족시키려 합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이 그 어떤 이름으로 정했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종교 행사와 예배들이, 실상은 생명 없는 율법주의적 행위의 만족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는 창조의 빛이 없는 "혼돈과 공허" 속에서 인간 스스로 인위적인 불을 밝혀 보려는 헛된 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인간 쪽에서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은혜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단순히 "지켜야 할 규칙"이나 "심판의 잣대"로만 본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자 죽음의 문자로 다가올 뿐입니다.
즉 율법은 구원받기 위한 행위조건이 아니라,이미 구원받은 자(언약 백성)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역시 언약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은혜로 허락하시는 생명을 우리는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것은 장정만 약 60만 명이나 되는 나라로 번성하여 출애굽을 한 것이 야곱이 70명의 가족을 이끌고 애굽에 내려간 이후(창 46:1-27) 43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출 12:37-40).
두 달 만에 신 광야를 지나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약 1년을 거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창 15:13-14, 새 번역] 13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제국 이집트의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 체제 아래에 있는 '노예' 상태였으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군대를 조직하거나 협상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성경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것" 뿐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에 기인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탈출할 수 없었던 불가능의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로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간 것은 결국 우연이나 상황에 따른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반드시 알라"고 명하신 예정된 경로였습니다.
만약 탈출이 인간의 전략이나 힘으로 가능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인간의 승전 기록인 그들의 승리의 역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언약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애굽이 물리적 감옥이었다면 율법은 자신의 십자가 행위로 의를 쌓으려는 이들에겐 영적인 감옥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율법 아래에 가두어,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은혜의 통로만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갈 3:22-23]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당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계명)을 주신 시점은 이미 홍해를 건너 구원하신 후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가르침인 모세오경(토라)을 단순히 인간의 행위로 지켜내야 할 "법전"으로 오해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려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보다 "율법의 행위"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받은 613개의 율법 계명을 실천한다는 명목 아래 구체적인 조항들을 덧붙여 6천 개가 넘는 규례(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장로의 유전(미슈나/탈무드의 핵심)"을 만들어냈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는 열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그 '숫자'나 '행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이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조항들을 하나하나 다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언약의 관점에서 드러내는 하나님의 의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소유로 삼으신다는 것은언약을 위한 선택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5절에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듣고”는 ‘샤마’이고 “지키면”은 ‘샤마르’인데 이 말의 명령형이 ‘쉐마’입니다.
여기서 샤마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경청하고 순종함'을 뜻하며 샤마르는 울타리를 쳐서 소중히 '보호하고 간직함'을 뜻합니다.
신명기 6장에서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아)이라는 말씀입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계명”을 마음에 품고 새기는 것인데 과연 어떤 계명일까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손목과 미간에 표를 삼고 문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목이나 미간, 문에 기록하는 것은 할 수 있겠지만 마음에 새기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하시며 “또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을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신다는 것은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 안에 새기신다는 뜻이며,
우리 마음에 십자가(헬, ‘스타우로스’ : 언약의 기둥)를 세우심으로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되고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집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을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우리 성경에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번역하였데 직역하면"이 말씀들이 네 마음 위에 실제로 존재하게 하라. 즉,마음이 말씀이 되라’라는 말입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자원하는 심령'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언약의 말씀이 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강론하는 것인데 이는 예수의 형상이 굳건히 섰을 때, 즉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든든히 세워주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영적자녀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상급이다. (시 127:3, 새 번역)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과도 같으니, (시 127:4, 새 번역)
또한 그것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며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된 본질은 마음이 말씀이 되는 것이지 가르치고 기록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들리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이 말씀이 될 수 없다는 거이죠. 그래서 ‘샤마’ 즉 알아듣는 것이 순종이며, 언약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때, 복음의 눈으로 율법을 온전히 볼 때 우리 심령 한가운데 비로소 십자가가 굳게 세워집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이 그리스도라는 마침표에 도달할 때, 그것은 죽이는 법이 아니라 살리는 복음의 말씀이 됩니다.
율법(선악)의 완성은 사랑(생명)이며, 선악의 기준이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갈 때 비로소 그 나무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통로가 됩니다.
생명나무가 선악의 나무임을, 선악의 나무가 생명의 나무임을 알게 될 때(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간구-영생),
[요 14:10, 2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영적 예배입니다.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나의 의가 십자가의 빛 아래 소멸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이 유일한 기쁨이 될 때, 우리 안에는 은혜가 넘쳐흐르는 생수의 강이 굽이치기 시작합니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19:16-22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물음에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물은 것은 영생을 취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고 온전하시다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부자 청년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하나 결국 행위로 온전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율법이 부자 청년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기에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므로 율법이 죄가 아니죠
[롬 7:7-12, 새 번역] 7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8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9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11 죄가 그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나를 속이고, 또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습니다.
12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부자 청년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지킨다’라는 말이 서로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헬라어로 부자 청년의 표현은 ‘퓔랏소’(20절)인데 ‘퓌오’(나오다, 자라다)에서 온 말로 ‘꺼내 놓다’, ‘만들어 내다’, ‘밖으로 보여주다’라는 말이고 예수님의 표현 ‘테레오’(17절)는 ‘안으로 간직하다’, ‘마음에 새기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에도 지킨다는 말을 ‘어떤 말이나 명령에 대한 것을 행위로 지켜 드러낸다’라는 뜻과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지킨다’라는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마음에 품고 새긴다는 뜻입니다. 즉 계명(말씀)을 마음으로 간직하고 새겨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부자 청년은 자신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며 행동으로 옮긴 것을 예수님 앞에 꺼내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21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가난한 자”(헬 ‘프토코스’)란 절대적인 가난으로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팔아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이 아니라
네 속에 온전한 진리의 말씀이 있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 흘려 주라는, 즉 구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부자 청년은 영적으로 갈급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진리의 말씀이 자기 안에 없었기에 나누어 줄 수 없었고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 보여주기 위한 것(자기 의)에 불과했지 결코 율법으로 온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 즉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임이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절)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그 청년이 그 말씀을 떠났다’라는 말이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긴 들었으나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들리지 않았기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이 말씀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자 청년을 통해 당시 율법에 매인 유대인들의 상태를 폭로하신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다면 죄의 권세에 매여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모든 사람이 이와 같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라’와 ‘하지 말라’라는 율법으로 왜 주셨을까요?
십계명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기에"‘하지 말라"라는 계명으로 그들이 과거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그와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명령은 ‘죄악 된 애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었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것은 그들이 의롭다거나 수효가 많아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신 7:6-8, 새 번역]
6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7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유보된 상태였던 것이었습니다.
[출 15:26, 새 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인 나의 말을 잘 듣고,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나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의 규례를 모두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신 7:9-11, 새 번역] 9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10 그러나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벌을 내려서 그를 멸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늦추지 아니하십니다.
11 그러므로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야 합니다."
어린양의 희생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안고 있는 것이었죠. 이런 점에서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 십계명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해 어린양으로 인해 구원받았음을 알아야 하고, 또한 십계명을 통하여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구원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리적인 의미의 애굽 땅에 서라든지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속박이 아니라 ‘하지 말라’라는 죄악의 항목에 속박되어 있었던 것이고,출애굽이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광야가 그들의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그 방향은 십계명에 있는 두 개의 ‘하라’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라’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야 할 ‘가나안 땅’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의 애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이스라엘이 들어가고자 하는 곳도 지리적인 장소의 가나안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처소로 삼으시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안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5 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속에 의해서이고 이 구속을 직접 체험한 자로서 증거 할 자는 부모입니다. [출 12:26-27, 새 번역] 26 여러분의 아들딸이 여러분에게 '이 예식이 무엇을 뜻합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27 그러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것은 주님께 드리는 유월절 제사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을 치실 때에,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의 집만은 그냥 지나가셔서, 우리의 집들을 구하여 주셨다' 하고 이르십시오." 백성은 이 말을 듣고서, 엎드려 주님께 경배를 드렸다.
[출 13:14, 새 번역] 뒷날 당신들 아들딸이 당신들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거든, 당신들은 아들딸에게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부모들은 이 구속에 근거해서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같이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보여주는 것이 4 계명에서 밝혀주고 있는 “안식”입니다.
참된 안식이란, 단순히 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주권 안에 거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이란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신 결과로 주어지는안식이요, 하나님 왕국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듯이 행위로 무엇인가 하여 영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고 밝히셨듯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계명으로 받아 행위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마음에 새기게 하여 안식을 누리게 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결국 언약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미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언약의 말씀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 사도는 출애굽기 19:6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 대하여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선언합니다.
베드로는 2:4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며 하나님께서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니 어떤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나 너희(성도)들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걸려 넘어지는 자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넘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벧전 2:8, 새 번역]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상태’, ‘설득을 당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설득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완악한 마음, 즉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께 나아간다고 하지만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받은 자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아니라 산 돌로 받아 그 돌이 모퉁이돌 즉 기초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집이 지어지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한 자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2장에서 왜 갑자기 출애굽기 19장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돌로 설명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출애굽 당시 십계명 돌판을 주신 것(출 31:18, 34:1-9)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출 31:18, 새 번역]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하나님이 손수 돌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그에게 주셨다.
십계명 돌판을 언약의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나,
언약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새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되고 굴복된 자는 그 돌판이 의미하고 가리키는 분이 바로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구약 시대에서 주어진 십계명을 단순히 돌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언약의 말씀이신 메시아로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역시 십계명 돌판이 언약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알아듣는 자는십계명을 행위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제 우리는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고 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반응합시다(빌 2:13).
십자가의 빛 아래 나의 의는 소멸되고, 오직 예수의 의만이 유일한 기쁨이 될 때, 우리 배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입니다(요 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