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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스라엘

쉐마2614 2026. 4. 2. 04:5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직후부터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곧장 다시 오실 것이라는 뜨거운 기대 속에 살았습니다.

인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온갖 잘못된 예언이 난무했고,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재림의 날짜를 점치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보통 많은 사람은 종말을 '미래에 일어날 공포스러운 사건'이나 '특정 날짜'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적 의미에서의 종말"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히 드러나 확증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종말에 일어난 "죄에 대한 심판"과 "자기 백성에 대한 구원"은 십자가의 단번의 대속 사건을 통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이미 종말을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모든 기간이 바로 종말입니다.

성경에서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롬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여기서 참말(헬 알레데이아) 이란 숨김없는 진실, 즉 ‘진리’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진리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며,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시 31:5, 새 번역] “주님의 손에 나의 생명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이신 주님, 나를 속량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직역하면 ‘진리,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 연합의 의미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이 몸인 지체(교회)를 통해 흘러나오는 상태를 말하며 진리는 나 혼자 깨닫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진리는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진리’라는 단어를 문장 맨 앞에 넣어서 강조하며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거룩한 영 안에 있는 나의 영적 양심(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즉각적인 반응)함께 증거 한다’는 의미로 내 이성적 생각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영이 내 양심을 비추어 주시기에 그 증거는 확실하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비진리인 거짓을 말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말하며 이는 두 증인,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증언하는 것인데 내 양심은 그 거룩한 영 안에 있어서 함께 진리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울 사도가  조상의 전통과 율법을 무시하는 큰 변심을 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유대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로마 제국 전체에서 자기 명예를 떨치고자, 이방인들의 입맛에 맞게 진리를 변개한 타협주의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세상의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 설계된 사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참기 어려운 오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오해를 당함으로 인하여 전하는 복음이 오해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즉 진리 안에 있으므로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3절 이하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3-4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여, 가족이나 친지, 혹은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종교적 열심의 근거로 삼곤 합니다만, 이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첫 번째 수혜자여야 할 이스라엘 (언약의 백성)이 오히려 그 진리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  

즉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죄의 옛 습성, 스스로 왕이 되고자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그들의 '영적 눈먼 상태를 보며 비통해한 것입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이 말씀은 모세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 위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을 때 모세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출 32:31-32]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 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구한 것인데,

모세가 이렇게 기도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언약의 인물인 모세를 통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서 진짜 저주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갈 3:13-14]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저주”란 말의 헬라어, 어원적 구성은 ‘위로’를 뜻하는 ‘아나’와 ‘놓다/두다’를 뜻하는 ‘티데미’의 합성어입니다. ‘아나데마’라는 말인데 어원은 ‘높이 올려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 말에서 ‘신에게 바치는 것’, ‘신전에 올려놓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홀로 저주를 받으심으로 자기 언약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신 상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가 된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말하게 된 바울 사도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는 견고한 확신(로마서 8장)이 전제된 선포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혈통적 형제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수많은 혜택을 누렸음에도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버려진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그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당신의 몸 된 교회인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다른 표현들을 공통된 의미로 반복 표현하면서 이스라엘이 어떤 혜택을 누렸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롬 9:4-5]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즉 ‘양자 됨-영광(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들-율법, 예배-약속들’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자 됨”이란 이미 8:15와 23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들 됨’이라는 말이며,

성경에서 아들 됨의 의미는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누린다는 차원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갈 4:4-7, 새 번역]
4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5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양자 됨은 십자가로 인해 얻은 우리의 '새로운 법적 신분'이며, 영광은 그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 계시"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들 됨’과 ‘영광’이란 다른 의미의 표현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얻으신 그 영광(승리, 안식, 생명)이 이제 양자 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국 양자가 영광에 참여한다는 말씀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이 십자가로 완성하신 하나님의 모든 복과 안식을 '내 것'으로 상속받아 누리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또한 ‘언약들’이란 언약을 ‘율법’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언약들(헬, 디아데카가)이란?

일반적인 쌍방 계약이 아니라, 높은 편에서 낮은 편으로 일방적으로 베푸는 언약'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다윗과 맺으신 반복적이고 점진적인 약속들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관계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예배’(헬, 라트레이아) 란 품삯을 받고 일하다 ‘섬긴다. ‘봉사한다’란 말인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완성하신 ‘약속’으로 이스라엘을 섬기고 봉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연약하여 언약을 어길 때마다, 하나님은 제사 제도와 성막,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죄를 덮으시는 '수고'와 '봉사'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인간의 열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섬겨주신 그 은혜의 사건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미 선포하신 '약속들'이 성취되었음을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베푸신 거룩한 봉사"에 대한 우리의 "영적 양심의 순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이전에, 하나님이 언약을 위해 우리를 먼저  당신의 죽음으로 섬기셨다는 이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려야 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며, 그분의 언약 안에서 나를 돌보고 계시는 성령님의 교통 하심으로 우리 몸(옛사람)을 '산 제물'로 드리게 하여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라는 약속으로 온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즉, 예배라는 이 단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들로 삼으시고, 언약적 사랑 안에서 그들을 얼마나 철저히 섬기셨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매번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전문가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성취를 이스라엘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애초에 이를 '자기 언약'이라 하셨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친히 언약을 성취하실 것을 끊임없이 계시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된 것이며, 그 완성된 실체를 역사라는 시간 속에 풀어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죄악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현장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완성하신 사건입니다.

로마서 9장 5절은 이를 증언합니다. 개역개정판의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라는 다소 난해한 표현을, 쉬운 성경에서는 “족장들이 그들의 조상들이며, 그들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라고 번역하여 그 의미를 훨씬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예비된 '혈통적 통로'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아멘"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역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세상 역사를 끝내시겠다는 증거입니다.

[마 8:11-12] “또 너희에게 이르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여기서 '본 자손'인 유대인들은 쫓겨나고, '동 서로부터 온' 이방인들이 참 이스라엘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입니다.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자녀이며,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지구상의 국가 이스라엘의 회복에 연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아난 자들입니다.

나의 직분이나 신앙 경력으로 구원을 확신하며 안주하는 자는 십자가와 상관없는 자일 수 있습니다.

성도는 구원에서 탈락할까 염려하는 자가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는 자입니다.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과 영광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