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 중 셋째 날, 바다와 땅이 나누어지는 질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구원의 신비를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 1-2장이 창조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지만 오늘 본문의 셋째 날 내용을 보면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창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나누시고 땅이 식물을 내도록 하셨습니다. 실제적인 창조가 없다는 점에서 셋째 날은 창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꼭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만드신 것만 창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만물을 나누고 조성하시는 방식을 통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의 계획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므로 그 안에서 물리적 법칙을 따지거나 과학적 세부 사항에 얽매이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셋째 날에는 식물들을 만드셨는데 식물이란 햇빛에 의한 광합성 작용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셋째 날 식물을 창조하시고 넷째 날에야 태양을 만드신 순서를 두고, "광합성 없이 식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며 자연법칙만을 앞세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본질을 놓치는 시각입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의 창조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거나, 단지 기적적으로 하루를 버티게 하셨을 것이라는 식으로 인간의 잣대 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가두려 한다면, 창조 속에 있는 진리를 믿음으로 마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창조 기사를 해석하려 할 때,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난제들에 부딪히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창공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어 구별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땅을 만드신 것이 셋째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9-10)라고 하였는데 ,
바른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우리 성경에 “천하의 물”이라고 하였는데 궁창(하늘) 아래의 물을 말하는 것이며, 여기서 “뭍”(히, 얍바사)이라고 번역된 말은 바른 성경에서 번역한 바와 같이 "마른 곳"이라는 뜻입니다.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마른 곳이 드러나게 하셨는데 한 곳으로 모은 물을 바다라고 하셨고 마른 곳을 땅이라고 하셨는데 이 단어는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해되는 표현입니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출 14:21-22)
22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2-24)
혼돈의 아래 물(죽음/심판) 속에 잠겨 있던 땅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드러난 것은,죽음의 심판을 뚫고 솟아오르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위에 세워질 성전의 터를 예표 합니다.
우리가 성전이 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혼돈(바다) 속에서 말씀의 능력으로 마른땅(그리스도의 의)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바닷물이 물러가서 드러난 마른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마른땅을 통해 들어간 약속의 땅, 그 땅에서 이스라엘은 홍해와 요단강을 건넌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그곳이 말씀(율법)에 의해 살아가는 땅이 된다는 이런 점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너 마른땅을 밟고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여 그분의 생명 위에 세워진 "말씀의 성전"이 되는 과정을 역사 속에서 예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8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7-8)
인류가 범죄함으로 인해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메시아의 구원과 회복이 임하기 전까지 그 황무함뿐인 "닫힌 땅"입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열 수 없는 "땅"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가나안은 왜 메시아가 오시기 전까지 "닫힌 땅"이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지적하듯, 구약의 제사와 땅은 모형일 뿐 그 자체가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범죄 했고 결국 다시 쫓겨났습니다. 이는 지리적 가나안이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니었음을, 즉 ‘메시아’라는 실체가 오기 전까지는 진정한 안식(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율법은 ‘길’을 가리키지만, 이스라엘은 그 길을 걸어갈 생명력(그리스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인 동시에, 그들이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절감하게 하는 닫힌 문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 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 나라는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진짜 이스라엘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인간의 역사에서 가나안의 문이 처음으로 진짜 열리는 순간입니다.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5-17)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막 10:38, 새 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눅12:50, 새 번역]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므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선언을 하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니 하늘이 열려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창세기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 즉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루시는 모든 의, 그것을 선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덮고(휘페르), 그 위에 하나님의 의를 입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이 지점에서만 하나님은 인간을 보며 다시 한번 "토브(좋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낡은 옛사람이 쪼개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쏟아져 나오는 그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며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창조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이란하나님께서 친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시는 곳"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다”(히, 얌)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의 상황을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출 14:27-28)
하나님께서 ‘바다(얌)’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이유는, 그곳이 "창조 이전의 혼돈을 상징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바로(파라오)를 신으로 숭배하던 세상 권력의 중심입니다. 이들이 ‘얌(혼돈의 바다)’ 속에 갇혔다는 것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권력과 의지는 결국 창조 이전의 혼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갈라 길을 만드셨으나, 애굽은 그 길을 ‘자기 힘’으로 쫓아왔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구원의 길을 가려하는 것 자체가 심판의 원인이 됩니다. 십자가가 누구에게는 구원이고 누구에게는 걸림돌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담은 뱀의 유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생명)을 따르기보다, 내 눈에 보이는 "선과 악"으로 판단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뒤를 쫓던 바로의 병거들은 바로 이 ‘아담의 본성(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열어주신 구원의 길을 ‘자기 힘(병거와 기병, 율법행위)’으로 점유하여, 다시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을 자기들의 통제 아래 두려 했습니다.
아담이 열매를 취해 영생을 얻으려 한 것이나, 바로가 병거를 타고 구원의 길(바다 사이의 길)을 침범한 것이나,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리(왕권/구원)를 찬탈하려는 행위’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은 마른땅을 딛고 죽음을 통과하여 새 생명으로 나왔지만, 애굽은 자신들의 힘(병거)을 의지하여 십자가의 통과(죽음)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신의 선을 고수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부하는 모든 ‘자기 의’는 결국 그 자신이 의지하던 ‘물(심판)’에 잠기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마른땅’을 밟는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왕이 되려는 아담의 욕망(병거)이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궁창)으로만 살아가게 되는, 오직 말씀에 의해 설득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성전의 터"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과 심판, 세례의 의미인 바다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출 38:8]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여기서 물두멍이란? 성막 뜰의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놓인 커다란 대야입니다.
놋(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거나 번제단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전, 손과 발을 씻어 정결하게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씻지 않고는 결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 성전에서는 이 물두멍을 “바다”라고 칭하였습니다
[대하 4:6, 새 번역] 솔로몬은 또 씻을 물을 담는 대야(물두멍) 열 개를 만들어서, 다섯은 오른쪽에 두고, 다섯은 왼쪽에 두어, 번제물을 씻는 데에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다 모양 물통에 담긴 물은 제사장들이 씻을 물이었다.
제사장의 정결례가 예수님의 물세례를 예표하듯,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자리에 기꺼이 서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시편이 선포하는 만물의 경계처럼,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모든 시간과 질서는 하나님의 정교한 섭리 아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정해진 경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성전의 터로 부름 받았습니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 104:9)
복음서에 보면 갈릴리 호수를 대체적으로 ‘호수’(막 7:31, 요 21:1)로 표현하지만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표적이나 물 위를 밟고 걸으신 표적에서는 ‘바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마 8:24-27, 14:25-26, 막 4:39-41, 6:47-49, 요 6:16-25).
예수님은 이런 표적을 통해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죄악 된 세상, 곧 마귀의 권세를 밟으시고 십자가로 온전한 승리를 이루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실체를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계 13:1)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불이 섞인 유리 바다”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성막을 만들면서 여인들의 거울로 만든 물두멍, 곧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표현인데, 불이 섞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정결해지는 곳이고, 계시록의 유리 바다는 하나님 앞에 서기 전 구원받은 성도들이 통과하거나 그 앞에 서는 장소입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정결함의 장소'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심판을 통과한 자들은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심판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에 의한 것이기에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입니다
[계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환난은 아담 이후로 이어져 온 ‘행위 언약’의 종말을 고합니다.
환난(들립시스)-‘압착’, ‘눌림’, ‘고난’. 올리브를 으깨어 기름을 짜내는 압박을 뜻합니다.
율법의 돌판을 의지하던 시대, 성전 건물을 의지하던 시대가 이 압착(들립시스)을 통해 끝납니다.
디아데케(새 언약)가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옛 질서의 붕괴’라는 통로를 지나야 했습니다.
이 환난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겪으신 ‘에클라센(파쇄)’의 현장이자, 낡은 율법의 너울이 찢겨나가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큰 환난(압착)에서 나온다는 것은, 나의 기준이라는 성벽이 완전히 부서진 자리에 어린양의 피라는 ‘새 언약’이 덮여,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성전의 예복을 입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얻어 아들로 만들어지는 땅은 무엇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까요?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그다음 구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11-13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땅이 낸 것은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인데 사람을 지으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것에게 주신 것이 풀이고사람에게 먹을거리로 주신 것이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6-29)
“씨”(히, 제라)는 ‘자손, 후손’을 의미합니다
[창 17:7-8, 새 번역] 7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8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모두 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씨”는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막 4:14, 새 번역] 씨를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먹을거리로 주신 “씨 맺는”,“씨 가진”것이란사람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땅적 존재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는 자가 "사람"이고,풀을 먹는 자는 "짐승이요 새와 땅에 기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 40:6-8, 새 번역] 6 한 소리가 외친다. "너는 외쳐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7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이 "풀(육체적 본능)"을 의지하면 시들고 사라지는 존재가 되지만, 씨(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지닌 "진짜 사람"이 됨을 증거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새 사람으로의 창조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 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0-11)
인생의 본질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세상의 풀을 먹는 자는 짐승과 같이 썩어질 육체로 머물지만, 생명의 씨(말씀)를 먹는 자는 그리스도를 품은 '진짜 사람'으로 회복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씨앗을 먹음으로, 시들지 않는 영생의 삶을 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