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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택

쉐마2614 2026. 5. 15. 04:2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평강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선택" 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의지나 선택인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창세 전부터 우리를 향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네가 노력한 만큼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하늘의 비밀을 선포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열심이라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성취가 아니라, 죽음 가운데 있던 우리를 일방적으로 끌어올리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이 복된 소식이 여러분의 심령에 참된 안식과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롬 9:14-18, 새 번역]
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17 그래서 성경에 바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구원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교회사 속 개혁주의 안에는 큰 두 부류의 흐름이 존재합니다.

이른바 알미니안주의와 칼뱅주의의 논쟁입니다.

알미니안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간은 타락했어도 하나님께 반응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죽은 존재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실 때, 인간 편에서 그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의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결국 구원이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인간의 ‘믿겠다’는 고백이 더해져야 비로소 성립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칼뱅주의의 시각은 전혀 다릅니다. 타락한 인간은 구원의 반응을 보일 수 없는 '철저한 시체'와 같기에,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만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습니다.

구원의 줄이 내려와도 그것을 잡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우리에게 성령이 찾아오셔서 강권적으로 믿음을 선물하신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 구원'을 말한다면, 칼뱅주의는 선택된 자들을 향한 확실하고도 특별한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할 가능성'을 열어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실제로 완벽하게 구원하신 사건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원에 대한 이들의 주장을 조금 더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칼뱅주의 (Calvinism)

종교개혁가 존 칼뱅(John Calvin)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며,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합니다. 1618년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에서 확립된 '칼뱅주의 5대 강령(TULIP)'이 핵심 요약입니다.

- T (Total Depravity) - 전적 타락: 인간은 죄로 인해 완전히 부패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어떠한 선함이나 의지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 U (Unconditional Election) -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이나 행위, 믿음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구원할 자를 창세 전에 미리 정하셨습니다.

- L (Limited Atonement) - 제한적 속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효력 있는 대속입니다.

- I (Irresistible Grace) -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부르심은 거부할 수 없으며, 반드시 구원으로 인도됩니다.

- P (Perseverance of the Saints) - 성도의 견인: 한 번 구원받은 신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시므로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2. 알미니안주의 (Arminianism)

네덜란드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의 사상을 따르며, 인간의 책임과 자유 의지를 강조합니다.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하며 제기된 '5개 항론'이 중심입니다.

- 부분적 타락: 인간이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을 통해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회복되었다고 봅니다.

- 조건적 선택: 하나님은 누가 믿을지 미리 아시고(예지), 그 믿음을 근거로 그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 보편적 속죄: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으나, 그 효력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나타납니다.

- 가항적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주어지지만,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이를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있습니다.

- 구원의 상실 가능성: 신자라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배교한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초기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신중했으나 후대에서 강조됨)

이 두 흐름은 오늘날 개신교 교파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어, 장로교는 주로 칼뱅주의를,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교회 등은 알미니안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들은 교단이나 교파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이 두 가지 양상이 혼재된 채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특정 교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앙의 색깔과 고백이 명확히 구분되었으나, 이제는 그러한 경계조차 희미해졌습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성경의 권위나 전통적인 교리 아래 있기보다는, 각자 자기 마음에 옳은 대로 믿고 자신이 편한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곤 합니다.

특히 칼뱅주의를 교단의 정체성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 강단에서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은 알미니안주의에 가까운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의 행위와 종교적 노력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물론 이러한 강조가 믿음 이후의 '신앙적 성숙'을 위한 권면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인지 아니면 성숙을 위한 과정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의 종교적 행위와 의지적 결단을 앞세우곤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보다 인간의 결단과 노력을 신앙의 중심에 두게 만듭니다.

이는 마치 가장 좋은 편인 '주님 곁에 머무는 안식'을 뒤로한 채, 스스로의 열심으로 분주했던 마르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이 아닌, 자신의 성취를 신앙의 척도로 삼게 됨으로써 성도들은 본질을 잃고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건물 교회들이 이처럼 인간의 열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성도들을 신앙적 나태함에 빠뜨릴지 모른다는 착각과 우려 때문입니다.

내 운명의 열쇠를 스스로 쥐고 있으며, 나의 종교적 행위의 열심과 결단에 따라 구원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는 훨씬 도전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지기에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강조해야만 눈에 보이는 종교적 열심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신앙적인 성취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과 주권적인 선택이라는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참된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한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이 없는 진리는 생명력을 잃은 채, 인간이 만든 딱딱하고 진부한 신학적 교리의 틀 안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거듭나기 전 그 누구도 이와 같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이런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을 오직 '인간을 구원하는 것'에만 핵심이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마저도 '나 개인'을 향한 축복이나 특권으로 여겨 성경을 스스로 해석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예정이나 선택이란 단순히 우리 죄인을 향한 것이거나 나의 구원을 기준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이란 마치 수많은 무리 중에서 단순히 하나하나를,골라내시는 선별적 구원이 아니라 있음의 존재를 통해 없음 가운데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작업입니다.

이 작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창세전 미리아신 이들을 정하신 때에 불러내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성전인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구약 성경의 에서와 야곱이라는 인물을 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 한 개인을 사랑하고 에서라고 하는 한 사람을 미워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라는 이스라엘 안에 이 땅에 보내실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언약이었고 하나님의 선택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합니다. 내 운명이 나의 분투와 상관없이 창조주의 주권에만 달려 있다는 사실이, 자기 성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죄인인 인간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불공평과 '불의'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씨에 대해서 말하면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를 대조하여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들어서 설명하였던 것을 이제 더 구체적으로 모세와 바로를 예로 들어서 제시합니다.

14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라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강조하여 답변하는데 여기서 '불의'란(헬, 아디키아- '의(dike)'가 없는 상태, 즉 불의, 부당함, 공정하지 못함을 뜻합니다.) 단순히 도덕적인 결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의'(롬 3:5)나 절대적인 '진리'(요 7:18, 롬 1:18, 2:8)와 정면으로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롬 3:5, 새 번역]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내가 말해 본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더 돋보이게 한다면, 죄를 지은 우리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이 부당한 것 아니냐?"라는 궤변적인 질문에 대해, 바울은 이어지는 6절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라며 단호하게 반박합니다.

[요 7:18, 새 번역] 자기 마음대로(헬라어, 헤아우투-자기 생각대로 )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즉, 말하는 이의 목적이 '자기 과시'에 있는지, 아니면 '보내신 분(하나님)의 뜻'에 있는지에 따라 그 가르침의 참됨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의를 ‘불공평’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나 진리가 인간이 생각하는 공평하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하고 지향하는 기계적 공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즉, 기준점이 '인간적인 공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거룩함(진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홀로 의로우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구약의 말씀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긍휼”(헬, 엘레에오-불행한 처지에 있는 자에게 베푸시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도움)과 “불쌍히 여김”(헬, 오이크테이로-자궁'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헴'에서 유래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듯 그 불행을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주관적이고 깊은 감정)이란 말이 달리 쓰이고는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기계적으로 불쌍한 사람을 골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비참함을 마음 깊이 아파하시며 (오이크테이로) 그 고통의 자리에 구원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내미시는 (엘레에오) 분임을 나타내기에, 두 단어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같은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결국 바울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두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내가 충분히 불쌍해지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겠지'라며, 스스로를 불쌍한 상태로 만드는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로마서 9장 14절에서 다룬 "하나님의 공의"와 "불의"에 대한 논증이 바로 이 출애굽기 33장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본래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인용된 출애굽기의 말씀을 살펴보며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9-20)

그런데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그 대상인 이스라엘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 상황을 알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시내 산에 머물게 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 삼으시는 언약의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이 거룩한 교제를 위해 모세를 산 위로 부르셨으나, 산 아래의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안에 머물던 그 40일 동안, 기다림에 지친 백성들은 아론을 앞세워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낸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정한 절기와 제사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이 사건은,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욕망' 아래 두려 했던 타락한 본성임이 드러납니다."(출 32:1-29).

그때 모세가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출 32:31-32, 새 번역]
31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며(출 33:7-11)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이 누구는 용서하시고 누구는 그러지 않으시는가'에 대해 불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있으며, 구원이란 그 '죽은 존재'들 위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이 부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 2:23)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란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을 임의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작업이 아닙니다. 이미 모두가 지옥이라는 죽음의 상태에 있는데, 그 절망 가운데서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살려내신 은혜의 사건입니다.

출애굽 당시 그 '누군가'는 바로 모세였으며,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백성의 죄를 사해 달라는 그의 기도는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저주를 짊어지실 언약의 인물을 지칭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진정한 언약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영원한 긍휼의 본질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 18:15, 새 번역]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요?

16절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아 되는 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달음박질하는 자’란 바울 당시 경주에서 승리하여 월계관을 차지하려 분투하던 운동선수들을 빗댄 표현입니다. 즉, 구원이란 운동장에서 땀 흘려 달려가 승리를 쟁취하듯, 인간의 노력이나 실력으로 얻어낼 수 있는 보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결정적 원인은 죄인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편에 있음을 이 비유는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제 바로의 사례를 제시하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토록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궁극적인 의도가 무엇인지를 밝히 드러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7절) 라고 출애굽기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출 9:16, 새 번역]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여 주어,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세웠으니”라는 말은 일으켜 세우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다' ‘존재하게 하셨다’라는 의미이고 능력이란? 힘(권능,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존재하게 하신 이유는
바로가 선해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완악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그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에 이름이 필요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름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은 이 땅에 이름을 가진 분으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가장 낮은 곳에 구원의 이름으로 오셔서, '없음'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생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마 1:21, 새 번역]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 21:9, 새 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분이 바로 죄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바로를 선택하여 역사 속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은  바로의 완악함이라는 배경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실 긍휼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8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자에게는 베풀지만, 은혜를 베풀지 않을 자에게는 베푸시지 않는다는 이 말씀이 우리가 은혜를 베풀만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베푸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금송아지를 만든 출애굽 사건을 통해 보여주듯이 우리는 은혜를 입을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긍휼이 베풀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4:21, 7:3,13, 9:12, 10:27, 11:10, 14:4,8,17에 나오는데 헬라어로 스클레뤼노, 문자적으로는 ‘굳게 하다’, ‘굳어지다’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뜻에 강하게 저항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완악하게 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죄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악한 마음을 주입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을 "내버려 두심"이라 말씀합니다


[롬 1:24, 새 번역]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롬 1:26, 새 번역]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롬 1:28, 새 번역]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두셨습니다.

인간은 죄의 권세에 매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하나님을 강하게 대적하는 존재인데 그 상태 그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인간의 죄악 됨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이름을 드러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나 애굽을 심판하신 것은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이름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결국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지는 전적인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의미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모세와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만한 일을 했고, 바로와 애굽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할 만큼 하나님께 괘씸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도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부르신다고 생각하는데 로마서 4:1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부르심입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리를 부르셔서 영생의 자리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없음의 상태에서 부르심으로써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죄인을 죽이신 거기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자, 생명이라는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없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치 있는 사람을 고르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가치도 생명도 없는 상태에 있는 우리를 부르셔서 존재하게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명령입니다.

즉, 구원은 나의 노력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던 시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눈을 뜨는 기적'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이란?


인간들이 하는 것처럼 두 가지 중의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없음의 상태에서 새롭게 만들어 내셔서 십자가로 베푸시는 긍휼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전의 죄 가득한 모습 그대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의 권세 아래 살던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철저히 죽게 하시고, 그 죽음의 자리(절망의 끝)에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죽음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되는 '부르심의 지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어지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호세아 2장 23절의 약속처럼,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가 긍휼을 얻고, 내 백성 아니던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적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시겠다는 [신 18:15]의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철저히 죽게 하시고,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끄집어내셨습니다.

죽어 있던 우리를 향해 "나오라" 명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이 놀라운 주권적 은혜 앞에 우리의 모든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만을 찬송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